google.com, pub-9025519090950042, DIRECT, f08c47fec0942fa0 켈로부대(KLO): 역사 속에 숨겨진 이름 없는 영웅들 - 1부
본문 바로가기
별난시리즈

켈로부대(KLO): 역사 속에 숨겨진 이름 없는 영웅들 - 1부

by exit999 2025. 6. 7.

부제: 켈로부대 조국을 위해 이름 없이 싸웠던 그림자 용사들의 이야기

 

YTN2 밀덕스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159회 무삭제 확장판] 국군의 날 특집! 잊혔던 영웅들, 켈로부대 시청 리뷰 입니다.

 

1편과 2편으로 나누어 포스팅 합니다.

역사의 그늘에서 걸어 나온 영웅들 켈로부대(KLO)

 

 

최근 6.25 전쟁 제73주년 행사에 켈로부대(KLO, Korea Liaison Office) 출신 참전용사가 참석하여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비정규군', '숨겨진 인물들'이라는 이름표 뒤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공로가 오랜 시간이 흘러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6.25 전쟁 73년 후 켈로부대 공로 인정


미군 소속의 비밀 첩보부대로서 음지에서 활동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또 다른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켈로부대원들이 걸어온 고난과 영광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1. 켈로부대란 무엇인가? - 항일의 불씨에서 첩보부대로

켈로부대, 즉 'Korea Liaison Office'는 그 이름만 보면 '미 극동군 사령부 주한 연락처'라는 다소 평범한 기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대북 첩보 활동을 위한 위장 명칭에 불과했습니다.

 

켈로부대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켈로부대의 시작

 

반공 독립운동가 김성회 선생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단체 '양호단(楊虎團)'이 그 모태입니다.

이들은 항일 운동을 펼치다 해방 후에는 반공 정신으로 뭉쳐 북한 지역의 소련군 동태를 정찰해 미군 정보기관에 전달하는 등 초기 정보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의 능력을 눈여겨본 미군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철수하면서도 군사 고문단을 남겼는데, 이 중 제308 방첩대에서 양호단 인사들을 활용하여 대북 첩보 수집을 이어갔습니다.

북한 지역에 자유민주 반공 투사들로 구성

 

하지만 조직이 빈약하여 정보 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38선 부근에서 남북 간 무력 충돌이 빈번해지자 미 극동군 사령부는 독자적인 첩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9년 6월 1일,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 찰스 윌로우비의 주도하에 기존 양호단 멤버들을 중심으로 위장 명칭을 가진 첩보 단체, 켈로부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켈로 부대 조직도

 

초기에는 미군 정보요원 5명과 한국인 대원 10명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그 중요성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2. 첩보와 유격, 두 개의 얼굴로 싸우다

켈로부대의 주 임무는 북한의 정부기관이나 군 조직에 침투하여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첩보의 중요성은 극대화되었고, 켈로부대는 '위스키(Whiskey)', '선(Sun)', '고트(Goat)', 'SOU' 등 4개의 특수공작 단위 부대를 거느린 조직으로 확대됩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한 장면

 

 

한편,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자생적인 무장 단체를 결성하여 항거하기 시작했습니다. 황해도 구월산 반공유격대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나 북한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확보한 무기로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1.4 후퇴 당시 국군 및 유엔군과 함께 남하한 이들 유격대원들은 주로 연평도, 백령도 등 서해 도서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미 제8군 사령부는 이들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무기와 식량을 지원하여 정식 유격 부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결과, 1951년 기존 켈로부대 조직과 이들 자생적 유격대를 흡수 통합하여 '켈로 8240 사령부'가 창설됩니다. 이 사령부 예하에는 첩보를 담당하는 '첩보과'와 유격전을 수행하는 '유격과'가 나뉘어 편성되었습니다.

 

유격과에는 '동키(Donkey)부대', '울프팩(Wolf Pack)부대', '제1공수 유격대', '커클랜드(Kirkland)부대' 등 북한 출신 유격대원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처럼 켈로부대는 첩보와 유격이라는 두 개의 얼굴로 전장의 최전선과 적 후방 깊숙한 곳에서 활약했습니다.

 

3. 이름 없는 영웅들의 빛나는 활약상

켈로부대 생존자 및 증언
켈로부대 생존자 및 증언

가. 인천상륙작전의 불멸의 등불: 팔미도 점령

 

켈로부대의 활약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은 단연 인천상륙작전일 것입니다. 성공 확률 5000분의 1이라는 극악의 조건 속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둠을 밝힐 등대의 불빛이 절실했습니다.

켈로부대 인천상륙작전에 숨은 공로 부대
전 세계에서 상륙작전이 어려운 지역
전 세계에서 상륙작전이 어려운 지역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고 성조기를 게양하라!"

 

맥아더 사령관의 직접 명령을 받은 켈로부대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6명의 대원들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직전, 팔미도에 은밀히 침투했습니다.

 

북한군 1개 분대를 격멸하고 등대를 점령한 그들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등대의 점등 밸브를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규봉 대장은 포기하려던 순간, 손에 잡힌 밸브를 돌려 극적으로 등대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 불빛은 연합군 함대의 길잡이가 되었고,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결정적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창건 박사(켈로부대 출신, 한국 원자력 1세대 연구자)는 당시를 회고하며 "망원경으로 등대의 불빛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이 씩 웃으며 진격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켈로부대 주요 부대원
인천상륙작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의 시작

나. 전세를 뒤바꾼 결정적 첩보들

 

켈로부대는 한국 지형에 어둡고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미군에게 귀중한 정보원이었습니다.

 

1952년부터 53년까지 켈로부대가 보고한 첩보 건수는 무려 14,719건에 달했는데, 이는 다른 첩보부대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수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기상 정보 수집입니다. 

첩보의 중요성
첩보의 중요성
첩보의 중요성
첩보의 중요성
첩보의 중요성

 

당시 미 공군은 중국 대륙의 기상 자료 부재로 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B-29 폭격기를 개조한 기상 정찰기는 북한 상공에서 소련제 미그기에 격추되기 일쑤여서 조종사들이 출격을 기피할 정도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켈로부대는 최규봉 대장의 지휘 아래 대원들을 기상 관측 훈련시켜 북한 지역에 상주시키며 기상 정보를 수집, 제공했습니다.

이는 미 공군 작전 수행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어선으로 위장하여 해안포대 위치나 북한군 동태를 파악하는 '오퍼레이션 셀러맨더(Operation Salamander)'와 같은 창의적인 첩보 활동도 수행했습니다.

 

다. 중공군 공세 저지의 숨은 공로: 용문산 전투

 

1951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당시, 켈로부대의 활약은 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야간과 산악 지형을 이용해 은밀히 이동해오자, 연합군은 그들의 정확한 집결지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에 켈로부대원들은 1950년 12월부터 적진 후방 깊숙이 공수 낙하하여 정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눈 덮인 산악지대에서의 정찰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당시 귀환율은 40%에 불과할 정도로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특히 중국어가 가능한 켈로부대원 12명이 적진에 투입되어 중공군의 정확한 집결지를 파악해낸 첩보는 국군 6사단이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는 등 용문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4. 그림자 속의 여성 대원들: 알려지지 않은 용감한 희생

켈로부대에는 남성 대원들뿐만 아니라 여성 대원들도 존재했습니다.

여성 부대원들의 활약
여성 부대원들의 활약

 

첩보과에는 약 20여 명의 여성 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주로 황해도나 연백 출신으로 현지 지리에 능통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951년 미 2사단 전술연락사무소(TLO)에 배치되었던 여성 공작원 천금자 대원은 어린아이 한 명과 함께 강원도 인제군 해안면에 침투하여 한 달간 잠복근무하며 첩보를 보고하다 안타깝게도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격 부대에는 더 많은 여성 대원들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취사, 빨래, 간호 등 작전 지속 지원 임무를 주로 수행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다수는 정식 대원으로 등록되지 못하고 '식모'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함께한 이들 역시 엄연한 전우이자 군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성의 부대 위치

여성 부대원들의 활약

 

팔미도 점령 작전 2주 전부터 인근 섬에서 작전을 지원했던 여성 대원들 중에는 경북여고 졸업반 학생 두 명도 있었다는 증언은 당시 여성들의 용기와 헌신을 짐작게 합니다.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이었지만 켈로부대와 연계하여 활동한 도정순 대원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원입대한 그녀는 철산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와 함께 첩보 활동을 펼치다 동료들은 철수했지만, 대장과 함께 남아 작전을 수행하다 끝내 실종되었습니다.

이처럼 전투 요원은 아니었을지라도 비전투 분야에서, 혹은 직접 첩보 활동을 통해 조국에 헌신한 여성 영웅들이 존재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5. 열악한 환경과 숨겨진 고난: 생존을 위한 사투

켈로부대원들의 빛나는 전공 뒤에는 처절한 고난과 희생이 따랐습니다. 특히 자생적으로 조직된 유격대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훈련이나 보급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창설 초기 일부 유격 부대원들은 한국 해군 함정을 만나면 "아들이 엄마에게 젖 달라 하듯" 무기와 탄약을 애걸해야 할 정도로 보급이 열악했습니다.

열악했던 전쟁상황

 

이후 미군의 지원으로 카빈이나 M1 소총, 심지어 로켓포까지 보급되었지만, 훈련은 여전히 미흡했습니다.

 

특히 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원들은 마땅한 숙소가 없어 연평중학교 등에서 숙식하며 제식훈련 정도만 받는 경우가 많았고, 실탄이 아까워 사격 훈련은 거의 하지 못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미군 측에서도 당시 이러한 특수부대를 체계적으로 훈련시킬 능력이나 전문 조직이 부족했다고 회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에 투입된 대원들은 엄청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훈련 부족은 곧바로 생존율 저하로 이어졌고, 자생적 부대들의 특성상 통제가 어렵고 보안 문제에 취약한 점도 있었습니다.

.

사명감 하나로 뭉쳤지만, 전문적인 군사 훈련과 지휘 체계의 부재는 그들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었습니다.


켈로부대원들은 이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이름 없는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중공군 격퇴 등 한국전쟁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아야 할 그들 중 다수는 전쟁 후 더욱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2부에서는 켈로부대가 전쟁 종료 후 그들의 피 맺은 절규를 따라 가 봅니다.
 
 
2부 예고
총성이 멎자 적진에 버려져야 했던 영웅들의 마지막 절규와, 수십 년의 침묵 끝에 시작된 명예 회복의 현주소를 따라갑니다.
국가의 약속과 기억의 의무에 대해, 켈로부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에 답을 찾아봅니다.